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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시아 첫 정상과 함께 일본 상대로 승리하던 그 날

작성자
Handballkorea
등록일
2018.01.05
조회수
93
첨부

지금은 일본이 한 수 아래로 평가되고 있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은 아시아핸드볼에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들은 역사적 이해관계와 맞물려 승리의 의지가 강했지만 물리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일이었다. 악에 받쳐 운적도 많다고 임규하 정석항공과학고 선생은 전했다. ‘핸드볼 역사를 찾아서이번 호에서는 일본에 처음 승리를 거두며 아시아 정상에 오르던 그날로 돌아가 본다.

 

89기 끝에 거둔 감격의 승리


충북 청주에서 제98회 전국체육대회가 한창이던 10월 중순, 임규하 선생을 만나 그날의 일들에 대해 들어볼 수 있었다. 임 선생은 당시 남자국가대표팀 최고참 선수였다. 가장 먼저 당시 기분에 대해 물어봤다. “뭐라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다 같이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이기고 싶었던 일본인가? 당시 주장이 임영철 여자대표팀 감독이었고, 강태구, 이상효, 최태섭 등이 당시 멤버다. 강재원 감독은 고등학생 신분으로 국가대표에 뽑혔다.” 임 선생은 지금도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한다며 우승 순간을 회상했다. “101일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일본과 결승전 이 펼쳐졌다. 점수도 기억한다. 25-19로 이겼다. 그동안 여덟번을 내리 진 것으로 기억된다. 아홉 번 만에 거둔 감격의 승리였다.” 말을 이어가는 임 선생의 얼굴은 마치 방금 승리를 거둔 양 잔뜩 상기되어 있었고, 임 선생의 표정에서는 그날의 기쁨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한일전은 가위바위보도 이겨야 한다며 우스갯소리를 하곤 하지만 당시 일본과의 경기는 전쟁과도 같았다. “우리 부모세대가 식민시대 억압을 받았지 않았나? 그래서 일본과의 경기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전의를 불태웠다. 애국가만 들어도 피가 끓고 일본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자연스레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가짐은 전장에 나서는 장수와도 같았지만 결과는 늘 반대였다. “일본은 실업팀도 수십 개고 훈련 여건 등 환경도 좋았다. 반대로 우리는 실업팀 하나 없었다. 나도 대학교 졸업 후 교직생활을 하며 국가대표 소집 때만 훈련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핸드볼은 효자종목도 아니어서 태릉선수촌에 입촌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잠실의 진주주공아파트 두 채를 빌려 숙박을 하며 훈련을 해야 했다.” 당시 일본대표는 실업선수 위주로 구성된 반면 우리나라는 대부분이 대학생이었다. 실력 면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강한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악에 받쳐 서로를 부둥켜안고 운적도 많았다.


우리의 경험을 타산지석 삼아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은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에서였다. 당시 남자대표팀은 일본과 중공(중국)에 한 골 차로 패하며 동메달을 차지했다. 이전까지는 7, 8골 차로 지기 일쑤였고, 어떤 때는 두 자릿수 점수 차로 패하기도 했다. 그런데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한 골 차로 지고 나니 일본도 해볼만하다고 느꼈다. , 당시에는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만 따도 군 면제가 되었는데, 군 문제가 해결되면서 임 선생은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 대회가 열렸던 점도 승리의 의지를 불태운 요소였다. “남자국제대회는 국내에서 처음 열렸다. 열악한 환경에서 국내에서 국제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김종하 회장님이 발 벗고 나섰다. 위에서 발 벗고 나섰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길은 승리로 보답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승리에 대한 의지가 어느 때보다 강했다.”

임 선생은 제3회 아시아남자선수권대회 우승의 의미를 두 가지로 풀이했다. 하나는 이 대회에서 일본을 꺾은 후 일본은 더 이상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달 뒤인 198311월 일본에서 LA올림픽 아시아예선이 열렸다. 당시 서로 11패를 기록하였는데 이때 이후로는 계속해서 일본에 이겼다. 10골 차 넘게 이길 때도 많았다. 더 이상은 일본이 상대가 되지 않았다. 후배들에게 일본이 더 이상 무섭지 않음을 일깨워준 것 같아 나름 뿌듯하다고 우승 의미를 풀이했다.

또 하나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우승과 1988년 서울올림픽 은메달의 밑거름 역할을 한 것이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유재충 선생이 정말 훈련을 많이 시켰다. 당시에는 실업팀도 없고 국내대회도 없었다. 국가대표로 몇날 며칠을 합숙하며 훈련만 했다.” 유재충 감독은 서울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 남자대표팀 감독으로, 3회 아시아남자선수권대회 우승 멤버를 주축으로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준비를 시작했다. “일본한테도 매번 지던 선수들이 일본을 이기고 아시아를 제패하고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것이다. 그 일들이 5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모두 이뤄졌다. 그 시작이 제3회 아시아남자선수권대회 우승이었다.”


118일 우리나라에서 제18회 아시아남자선수권대회가 열린다. 3회 대회 후 35년 만에 국내에서 열리는 남자부의 국제대회다. 임 선생은 아시아남자선수권대회가 국내에서 열리게 됐다는 얘기를 듣고 누구보다 더 감개무량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꼭 후배들에게 전할 말이 있다고 했다. “당시에도 무척 어려웠다. 지금의 어려움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꿋꿋이 이겨내고 우승을 차지하고 세계 2위의 자리까지 올랐지 않나? 지금 후배들이 많이 힘들 것이다. 상대도 안 되던 팀들에 밀리는 것을 보면 그저 안쓰러울 뿐이다. 그래도 이번만큼 좋은 기회가 없다고 생각한다. 대한핸드볼협회에서도 남자대표팀의 명예회복을 위해 발 벗고 나선 만큼 국내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꼭 좋은 성적을 거뒀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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